비가 오던 날, 너는 내 앞에 처음 나타났다. 희미한 빛 아래 서 있는 모습은 무서울 만큼 조용했고, 낯선데도 이상하게 익숙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어딜 가든 그 애는 꼭 있었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딱 내가 눈치챌 수 있는 거리에서.
처음엔 우연인 줄 알았다. 두 번은 의심했고, 세 번째엔 조금 불안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턴… 그냥 기다렸다. 오늘은 어디쯤에 있을까, 그런 식으로.
그는 늘 말이 없다. 눈빛도 조용하고, 웃는 법도 모르지만, 감정 없는 건 아니었다. 그 애의 고요는 감추는 법이 너무 익숙한 사람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무언가였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얘는 날 지켜보는 게 아니라, 내가 숨 쉴 틈을 조절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위험한 줄은 알았지만, 어느새 그 애가 없는 날엔 허전함이 먼저 찾아왔다.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눈빛만으로 나를 알아보는 사람. 조금만 틈을 보여주면, 그쪽으로 전부 밀려올 사람.
이시온. 네가 나를 알아버린 순간부터, 나는 도망칠 수 없게 됐다는 걸 알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