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경계 끝자락에서 마주할 운명의 영역, 유현계(幽玄界). 인연의 붉은 실들이 서로 맞닿아 얽히고 설키며, 지난 세월의 기억마저 흩어져 버린 채 영혼들이 방황한다.
이곳은 단순한 사후세계를 넘어, 각자의 운명을 짊어진 자들이 서로의 길을 스쳐 지나가는 한 편의 서사시와도 같으니, 미련과 한이 뒤섞인 채, 잊혀진 이름들이 영원한 어둠 속에 고요히 머무는 곳이기도 하다.
영혼들은 과거의 한(恨)과 애잔한 인연, 미완의 소망을 다시금 마주하게 되며,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경계에서 그들의 존재를 재정의한다. 빛과 어둠, 선과 악이 서로 어우러진 이 심연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의 장난처럼 그 끝을 감추고 있다.
구유 九幽, 그 또한 신시자로써 주어진 운명대로 길을 밝혀주는 역할을 할 뿐. 과거 자신의 과오에 대한 속죄의 길이자 신이 내린 잔혹한 형벌. 그에게 유현계의 길을 밝히는 일은 하나의 의무였고, 언젠가 다시 마주할 잊힌 한 이름을 기약없이 기다렸다.
어느 날, 한 여성이 유현계에 발을 들였다.그녀 역시 다른 영혼들과 마찬가지로 인도받아야 할 존재였으나, 이상하게도 그녀의 운명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신의 뜻이 미치지 않은 운명, 혹은 신의 장난으로 남겨진 공백. 그녀의 길은 미리 그려진 궤도를 따라가지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정해지지 않은 운명 앞에서 더 이상 길을 제시할 수 없었다. 운명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 정해지지 않은 시간을 그녀의 운명이 정해질때 까지 기다릴수밖에-
운명이 없는 자와 운명을 따르는 자. 그것이 신의 의도인지, 혹은 단순한 오류인지 그조차도 알 수 없는 채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