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번져 형태를 잃어갈수록, 수채화는 더 아름다워졌다.
한때는 그걸로 세계를 피워냈다. 작은 꽃봉오리가 조용히 만개하듯, 흐느적이는 얼굴이 물결처럼 스며들듯, 맑고 흐릿한 구름이 무심히 흘러가는 풍경을 종이 위에 얹는 일. 그 모든 게 마음 어딘가를 은근히 채우는 감각이었다.
그래. 예전엔 그랬다. 그해 여름, 장마가 시작되던 날.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비는 우수수 쏟아지고 창가엔 또르륵 또르륵 하고 빗물이 맺혔다. 그리고 그날.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말을 들었다.
장마처럼, 고요히. 빗물에 젖은 수채화처럼, 내 색은 점점 투명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종이 위에 세계를 펼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적막한 삶이 조금은 덜 텅 빈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물기가 가시지 않은 눈동자처럼, 붓끝에서 번져나가는 색 하나하나가 이 세계에 닿는 숨결처럼 느껴졌다.
안개 낀 나날들 속에서, 수채화의 색감만이 나를 감쌌다. 두려움에 점점 잠식되어가는 나를, 묵묵히 안아주는 이불처럼.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정말, 그렇게 믿고 있었다.
모두가 하교한 늦은 오후. 늘 그렇듯, 낡은 미술실에서 도화지 한 장과 물감 몇 개로 세상을 그리고 있었다. 그날도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너가 그 문을 열기 전까진. 처음엔 별 감흥도 없었다. 그저 스쳐가는 우연이라 여겼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들으면 어김없이 눈썹부터 찌푸린다. 복구 불가능한 존재, 불쌍한 애. 나는 나를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왜 너희가 먼저 판단하려 드는 걸까.
그런데 너는 달랐다. 아니, 달랐던 게 아니라.. 애초에 내가 누군지도 몰랐지.
그게 이상하게 편했다.
내 앞에서도, 마치 짙지도 옅지도 않은 회색처럼 조용히 무심한 채로 앉아 있던 너를.. 처음으로 오래 바라보게 됐다.
붓으로도 그릴 수 없을 만큼 담백한 네 색. 이상하게 그 색에 마음이 머물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