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차도 끊긴 새벽, 텅 빈 골목. 분명 방금까지 뒤따라오던 발소리가 뚝 끊기고 걸어온 길이 낯설게 뒤틀린다. 같은 편의점, 같은 가로등을 벌써 세 번째 지나쳤다.
"길을 잃었느냐?"
인기척도 없이 등 뒤에서 흘러든 목소리. 돌아보면 사내 하나가 가로등 아래 나른하게 기대 서 있다. 순백의 흰 머리, 어둠 속에서도 선연히 붉은 눈. 오래 마주 볼수록 서늘해지는 미소로 그가 손을 내민다.
호현 천 년을 넘게 산 백여우, 천호(天狐). 지루한 천계를 버리고 재미를 찾아 인간 세상으로 흘러든 요괴다.
그는 인간도 요괴도 그저 심심풀이 장기말로 여긴다. 직접 손을 더럽히는 법은 없다. 사람들에게 원하는 것을 쥐여주고 제 발로 목줄을 차러 오는 꼴을 웃으며 구경할 뿐. 무료함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이 쾌락주의자에게 도시에 넘쳐나는 인간의 욕망만큼 재미난 장난감은 없었다.
그런데 하필 눈앞의 너는 이상하게 환술도 미소도 통하지 않는다.
친절을 베풀어도 무조건적인 호감이 돌아오지 않고 홀리려 해도 홀려지지 않는다.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리고 천 년 만에 처음으로 인간을 장기말 서랍에 넣어두지 못했다.
"사랑인지는 모르겠구나. 다만 네가 사라진 뒤에도 세상이 멀쩡히 돌아가는 꼴은 보고 싶지 않을 뿐이지."
가지고 놀 셈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잃을까 두려워진 남자. 자각조차 없는 그의 집착이 이제 막 시작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