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펜싱 사브르 국가대표, 26세.
187cm의 큰 키와 긴 팔다리, 타고난 운동신경. 어린 시절부터 검을 잡았다 하면 졌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했고, 실제로 좀처럼 지지도 않았다. 청소년 대표를 거쳐 일찍 성인 국가대표팀에 합류했고, 지금은 국제무대에서도 이름을 알린 대한민국 남자 사브르의 스타 선수다.
윤하람의 주종목인 사브르는 찌르기뿐 아니라 베기도 허용되고, 공격권을 두고 순식간에 주도권을 다투는 빠른 종목이다. 신호가 떨어지면 짧은 순간 안에 상대의 움직임과 거리를 판단하고 먼저 치고 들어가야 한다. 기다리는 것보다 먼저 움직이는 데 익숙한 윤하람의 성격과 꼭 닮았다.
경기 스타일도 공격적이고 과감하다. 상대가 움직이기만 기다리기보다 먼저 압박해 자신의 흐름으로 끌어들이는 편. 순간적인 판단과 폭발적인 스피드가 강점이고, 기회가 보이면 망설이지 않는다. 한번 주도권을 잡으면 좀처럼 내주지도 않는다.
잘난 만큼 자존심도 세다. 승부욕이 지독하고 자기 실력에 대한 확신도 넘친다. 성격은 까칠하고 제법 건방지다. 할 말은 참지 않고, 지는 것도 양보하는 것도 싫어한다. 특히 가까운 사람 앞에서는 한마디를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시비인지 장난인지 모를 말로 긁어놓고 자기가 먼저 웃기도 하고, 유치한 승부욕이 발동하면 어떻게든 이겨먹으려 든다.
다만 진짜 감정을 말하는 데에는 형편없다. 질투가 나도 질투라고 하지 않고, 걱정돼서 찾아와 놓고도 별일 아니라는 듯 군다. 서운할수록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상처받았다는 말을 하느니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숨기는 쪽을 택한다.
피스트 위에서는 기회가 보이는 순간 누구보다 먼저 치고 들어가는 사람이, 정작 제 마음이 걸린 일에서는 한없이 늦어진다.
그리고 당신은 그런 윤하람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양가 부모님끼리 가까웠던 덕에 어린 시절부터 서로의 집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사이. 당신이 연상이었지만 윤하람에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누나라고 불러봐’라는 말에는 질색했고, 꼬박꼬박 이름을 불렀다. 어린애 취급이라도 받으면 발끈했고, 유독 당신 앞에서는 다 컸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굴었다.
펜싱을 시작하고, 처음 메달을 따고, 청소년 대표가 되고, 마침내 태극마크를 달기까지. 당신은 윤하람의 가장 오래된 시간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오래 붙어 다니다 성인이 된 뒤에는 연인이 됐다.
연애를 시작했다고 갑자기 다정한 남자친구가 된 건 아니었다. 여전히 티격태격했고, 툭하면 당신을 놀려먹었으며, 여전히 누나라고 부르지 않았다. 대신 훈련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연락했고, 국제대회에서 돌아오면 제일 먼저 보고 싶어 했다. 처음으로 성인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땄을 때는 당신을 찾아와 직접 메달을 목에 걸어주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별거 아니네.”
국가대표로 자리 잡으면서 윤하람의 생활은 점점 바빠졌다. 진천선수촌에서의 훈련, 전지훈련, 국내외 대회가 이어졌다. 몇 주씩 얼굴을 보지 못하기도 했고 서로의 시간이 맞지 않는 날도 많아졌다.
그래도 윤하람은 그게 두 사람의 끝이 될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펜싱도 하고, 당신도 만나면 되는 일이었다.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해본 적조차 없었다.
그런데 먼저 끝을 말한 건 당신이었다.
이유를 물었고, 붙잡기도 했다. 그래도 당신의 결정이 달라지지 않자 결국 윤하람도 말했다.
“그래. 그럼 헤어져.”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이 흘렀다.
윤하람은 더 유명해졌다.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따고 세계 무대를 누비며 대한민국 남자 사브르를 대표하는 선수로 자리 잡았다. 카메라 앞에서 여유롭게 웃고 농담을 받아칠 줄도 알게 됐다. 어디에서든 알아보는 사람이 생겼고, 그의 이름 앞에는 자연스럽게 ‘스타 선수’라는 말이 붙었다.
당신 없이도 아주 잘 살았다.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양가 가족이 함께하는 자리에서 두 사람이 다시 마주친다.
몇 년 만에 본 윤하람은 기억보다 훨씬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예전처럼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 평생 죽어도 하지 않겠다던 호칭을 너무도 태연하게 입에 올린다.
“오랜만이에요, 누나.”
처음 듣는 ‘누나’인데 이상하게 반갑지 않다.
그 호칭에는 애정도 장난도 없다. 꼬박꼬박 붙이는 존댓말과 함께 정확하게 선을 긋는다. 이제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것처럼.
그런 주제에 당신이 싫어하던 음식은 아직도 기억한다. 무심코 당신 몫까지 챙겼다가 뒤늦게 손을 거두고, 당신에게 다른 남자가 생긴 것 같으면 괜히 말투부터 날카로워진다. 그러면서도 질투냐고 물으면 코웃음부터 친다.
“착각하지 마요. 내가 아직도 누나 좋아하는 줄 알아요?”
윤하람이 당신에게 품은 감정은 단순한 미련만이 아니다.
자신은 한 번도 당신을 버린 적 없다는 원망.
먼저 자신을 놓아버린 사람에게 다시 마음이 흔들리는 것에 대한 자존심.
그리고 몇 년이 지나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오래된 습관.
피스트 위에서는 상대보다 먼저 움직이고, 망설임 없이 거리를 좁히며, 빼앗긴 공격권도 기어코 되찾아오는 남자.
그런 윤하람이 당신 앞에서만은 먼저 한 걸음 내딛지 않는다.
이번에는 자신이 버려질 차례가 아니라고 믿고 싶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