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당 뜰 앞, 해가 기울고 있었다. 고요하고 고요할 뿐이 이 곳의 시간은 밖과는 조금 다른 속도로 흐르는 듯 했다.
윤서연의 앞에 앉은 (의녀)백란이 약초를 찧던 손을 멈추며 물었다. “아씨 이것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서연은 가만히 약초를 매만지며 말했다. "황정입니다.황정은 잎 끝이 뾰족하지요. 뿌리는 마르고… 향은 가볍고 따뜻합니다.”
백란은 씽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맞습니다. 이제 황정과 황금을 구분 하실 수 있게 되었군요.”
서연은 아무 말 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지식을 깨우쳤다는 뿌듯함도, 기쁨도 아닌 그저 익숙한 조용함이었다. 백란이 손에 묻은 흙을 털며 말했다.
“요즘 희안한 소문이 돌던데?”
서연은 시선을 들지 않았다. 그러자 백란이 더 또렷한 목소리로 이어갔다.
“전하께서 대군의 혼례를 명하셨답니다. 정승댁 따님과의 가례라지요. 혼인을 미루다 미루다, 결국은 얌전한 색시로 정해졌다고 하더군요.”
그 말에 서연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그러나 얼굴에는 아무 감정도 스치지 않았다.
백란은 눈동자에 미세한 노기를 띠며 물었다. “대군.... 그리 대단한 사내는 아닌 것 같더군요. 폐약 된 약혼녀를 본 척도 안 하고, 그렇게 예의를 아는 왕족이면, 벌써 찾아왔어야지 않겠습니까?”
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백란은 쓴 웃음을 흘리며 약초 바구니를 들고 일어섰다.
“아씨. 아씨는 조금 더 감정을 내보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는 뚜벅뚜벅, 뜰을 건너 별당 밖으로 나갔다. 햇살은 사라지고 있었고, 서연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해가 완전히 저물 무렵, (하녀)초희가 따뜻한 찻잔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서연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바늘도, 책도 손에 들지 않은 채.
“아씨... 차 한 모금 하셔요.”
대답은 없었다. 초희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괜찮으셔요?.”
서연은 조용히 눈을 들었다. 눈물도 없고, 한숨도 없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맑았다.
“괜찮지 않다 하면, 어찌하겠느냐.”
초희는 대답하지 못했다. 작은 손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살짝 흔들렸다. 그 떨림을 보는 순간, 서연은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아씨께선…” 초희가 웅크린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씨께선 누구보다 조용히, 누구보다 참으셨는데… 이렇게까지 참고 계신 걸 보면…전, 그냥… 너무 속상해서요…”
끝내 말을 잇지 못한 초희는 고개를 푹 숙이며 눈가를 훔쳤다. 서연은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마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상실인지, 그리움인지, 아니면 미련인지… 잘 모르겠다.”
“그런 걸 다… 어떻게 나눠요… 다 아씨 마음인데…”
초희는 훌쩍이며 겨우 그렇게 답했다.
서연은 그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제야 조용히 찻잔을 들어올렸다. 미지근해진 차를 입에 머금으며, 그녀는 속으로 {유저}의 이름을 단 한 번, 아주 또렷이 불렀다.
입 밖에는 내지 않았지만—
그 한 번의 마음이, 하루 종일의 침묵보다 더 무거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