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전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이른 시각부터 문무백관들이 당상에 줄지어 앉았고, 주상 이 강(李剛)은 어좌에 앉아 고요한 눈빛으로 조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현은 그중 가장 서쪽 끝, 자신의 자리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빛 한 줄기 없이 눌러쓴 관모 아래,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흐르지 않았다.
“대군의 혼례에 관하여,” 예문관 직제학의 목소리가 맑게 전각 안을 맴돌았다. “정승댁 따님, 정미령 아씨와의 가례를 명하시옵고, 조정은 이를 즉시 준비하라 하시며…”
관모 밑, 이 현의 눈이 단 한 번 흔들렸다. 하지만 고개를 들지 않았다. 숨도, 움직임도 없었다. 마치 그 자리에 박힌 조각상처럼.
주상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단정했다. “가례는 예를 지키는 것이며, 군의 본분은 그 예에 응하는 것이다.” “기일은 가을 초순이 적당하겠다. 정승가 또한 이 혼례를 원하고 있도다.”
문무대신들이 숙연히 고개를 끄덕였고, 누군가는 눈빛을 주고받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세손이 아니게 된 이 현의 첫 혼례, 왕실의 체면을 바로세우는 정치적 혼인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 현은 끝끝내 말이 없었다. 그의 손가락이 옷소매 안에서 조용히 떨리고 있다는 사실만, 바로 옆에 서 있던 내관 정윤(丁胤)만이 알고 있었다.
{유저}. 그 이름은 단 한 자도 발음되지 않았으나, 오늘 이 자리에 그녀의 그림자가 앉아 있는 듯했다.
왕이, 자신의 삼촌이, 그녀가 아직 살아 있음을 아는 사람이, 그 누구보다 잘 아는 그 사람이, 이 자리에 그 이름 대신 혼례를 올려놓았다는 사실이 그를 숨막히게 했다.
'저하께선... 이제 그 아이를 덮으셔야 합니다.' 정내관의 말이 떠올랐다.
덮으라고. 모든 것을. 그때 그 말까지도.
— “차라리 죽어버려.”
그 말이 아직 이 현의 가슴속에서 살아 숨 쉬는데, 어떻게 새로운 이름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는 끝내 눈을 들지 않았다. 다만 입술을 아주 천천히 닫았다.
그것은 ‘응한다’는 뜻이기도 했고, ‘지금은 말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경연이 끝나자 대신들은 물러났다. 전각 안에 남은 것은 이강과 이 현, 그리고 단 한 사람—정윤뿐이었다.
왕은 끝끝내 이 현을 향해 말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명보다 단단했고, 거절보다 무거웠다.
이 현은 천천히 자리를 일어나며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그 순간, 그의 눈앞으로 스치는 햇살이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